2020-09-17 00:25:49


 

#고양이춤 #고양이 춤 피아노 #주승연 피아노

https://youtu.be/DGDHb8VWWbQ

 

2022-01-11 19:46:54


<2022년1월 7일(금) 출석부>
나를 잘 모르는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누구에게나 시련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고, 또 다가오고 있는지 모른다.

1984년 17살때, 일찌감치 고1,1학기를 마치고 학교를 때려치웠다.
다른 무슨 거창한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내가 처해진 환경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87년도인가...산너머 이웃마을에 수입한 외국소를 마굿간에 가두어 놓았는데, 이 소가 탈출하여 우리마을까지 와서 돌아다니다, 사람들에게 잡혀서 다시 마굿간에 가두었는데,,,이내 거품을 머금고 죽어 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 드넓은 초원에서 뛰어다니는 소를 마굿간에 가두어 놓았으니 얼마나 답답하였을 것인가.!

내가 딱 그 소의 심정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안의 모순과 이제 막 17세 소년의 사춘기가 시작되었음이리라..

딱히 목표가 없었으니 집에서 빈둥거리다,, 사사건건 부모님과 다투는 일이 잦아졋다. '저 놈이 왜 잘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빈둥대는지' 당신들도 의아해 했는지, 그해 가을걷이를 마치고, 초등6년부터 앓아온 축농증 수술을 부산에서 했다.(중략)

그 해 겨울에 부산에서 공장에 다녔는데, 윤리시간에 배웠든 "인간의 부품화"등을 몸으로 느낄수 있었고, 부모님 슬하에서 따신밥 먹고 학교 다녔던 것이 얼마나 따스한 것임을 눈물흘리며 깨달았다.

시골뜨기 촌놈은 세상이 춥고, 무서워 졌다. 지금까지 돌봄과 보살핌으로 살아왔던 시골에서의 평온한 세상이 아니었다. 여지껏의 생각과 가치관이 처참히 파괴되면서 정신상태는 온통 "대혼돈"이었다. 뭐가 옳고 그런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암울하기만 했다.

공장에서의 그 시끄러운 기계소리,화확약품냄새, 위험한 작업환경, 기숙사에서 폭력행위...

무리에서 떨어진 야생마는 포식자에게 좋은 먹잇감임은 자연의 이치이다.
이리 치이고, 저리 휘둘리고 ..

이런 이치를 부모님이 몰랐을리 없을터, "돈 벌러 가는 것은 좋은데, 고딩 졸업이나 하고 가라" 그렇게 뜯어 말렸건만...

2022-04-26 22:50:20


<짧은 소개>

유원초등학교 졸업

현재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세무회계사무실 하고 있음.

하는일은

1.업체들 장부기장,세무신고

2.양도세,상속세,증여세 절세상담 및 신고대행. 회계감사

2번은 전적으로 나혼자 다하고, 1번은 직원들이 전담하고 나는 검토만 함.

현재 직업에 만족하고 있고, 고객에 대한 서비스질을 높이고, 최고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쉬지 않고 공부하고 있음.

 

<출석부>

누구나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1992 25살 때, 병역의무를 마치고 1학년2학기 복학(창원대 경제학과)을 하고 영어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2학년 부터는 영어 전공책을 봐야 해서, 영어를 마스터 해야만 했다.

시사도 따라잡을겸해서 영자신문 사설을 매일 카피해서 도서관에서 밤늦도록 독해연습을 했다.

 

이즈음 나는 공인회계사가 되기로 마음을 정리하고 스스로 굳게 다짐했다.

마음 한켠으로는 나쁜놈들 때려잡는 검사가 되고 싶었지만,

우선은 돈을 벌어야 한다!

돈으로부터의 자유, 경제적인 굴레를 푸는 것이 먼저라 판단했다.

 

선조들이 일제치하에서 얼마나 억압받으며 비참하게 살았을 것인가?

 

나 또한 현실에서의 이러한 제약에서 조금이라도 해방되고 싶었다.

아니, 이 족쇄를 풀지 않고는 다른 어떤일을 한다해도, 항상 쇠사슬에 묶여 노예의 삶으로 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군복무 마치고 복학하기전 6개월여간 대구에서 포크레인 일하고, 졸업할 때 까지의 등록금은 마련해 놓았다. 국립대라 등록금도 비싸지 않고, 웬만하면 장학금도 받을 수 있어서 큰 돈은 아니다.

 

18살 때 울산에서 중장비자격증을 따서 20살 봄까지 경력을 쌓아놓은 것이 학자금마련에 쏠쏠히 보탬이 되는 격이었다.

옛어른들이 배워서 남주나?”하는 말이 딱 들어 맞는 것이 아닌가 싶다.

 

원래 계획상 1학년에 영어를 마스터하고, 2학년때부터는 본격적으로 회계사 공부를 시작하려 하였으나, 고시원비와 학원비를 생각하니 자금을 더 모아야 만 했다.(방학때 마다 서울에서 학원+고시원생활 해야)

 

영어공부가 탄력이 붙어, 그해 겨울방학 때 정말이지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지만, 입술 굳게 다문 내가 발을 내딛은 곳은 찬바람 횡하니 몰아치는 황량한 들판, 경북 의성의 경지정리 현장이었다.

 

내륙지방이라 창원의 겨울 바람과는 사뭇 비교도 안될 만큼 차거왔지만, 차라리 시원했다.

 

어느날 땅을 파고 있는데, 멀리서 아주머니가 오라고 손짓했다.

얼어붙은 땅 속에서 뭔가를 꺼내 내손에 쥐어 주셨다.

빠알간 사과였다.

2021년 가을 도봉산 망월사에서

https://youtu.be/bv_lwktn8SE

 

2022-05-15 14:53:00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더냐?”

, 제후, 장수, 재상의 지위는 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닌,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20대 초반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도, 틈틈이 책을 읽었는데, 아마 초한지에서 읽었던 듯 싶다.

다른 내용은 기억이 없지만 위 구절은 생생하다. 왜냐하면 저 구절이 나에게 현실을 타개할 용기를 불러 일으켜 주었고, 무의식속의 잠재력을 끌어내어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알아보니, 진나라 말기때 진승.오광의 농민 반란군이 위 구절을 명분으로 삼고, 농민들을 선동하였다 한다.

내가 쉽게 선동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에게는 impact하게 다가왔고, 진승,오광의 난 때처럼 내 현실을 타개할 명분으로 충분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곳은 달전이라는 마을인데, 유원에서 2km 골짜기로 더 올라가면 나오는, 당시 20여호가 사는 조그마한 산골이었다.

토양이 척박하고 달리 특산품도 없는 곳이라, 그 당시 깨어 있는 사람은 마을을 떠나 마산으로 이사가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친구네도 초등4학년때 마산으로 이사를 갔다.

이사를 간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방책은 아니지만, 지금의 현실을 헤쳐나갈 방법으로서 산골동네에서는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으리라...

친구 아버님은 부두에서 하역노동을 하셨고, 어머님은 어시장에서 생선을 사서 소매로 파는 일을 하셨다.

농사일이 힘들다 하지만, 아마도 시골생활보다 몇 배 더 힘든 고생을 감내하고, 자식교육과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담대한 결단을 하심에 틀림없으리라... 

우리집도 어머니가 마산으로 이사를 가자고 간청했지만, 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여기서는 돈이 없어도 생활이 되지만, 그기에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돈이고, 만에 하나 자신이 아프기라도 한다면 어떻게할 것인가를 이유로 반대했다.

당시 아버지는 이웃마을에 금(Gold)캐러 다니셨는데, 논갈고 밭가는 일만 도와주고, 나머지일은 모두 어머니 몫이었다.

사시사철 땅굴속에서 곡괭이로 땅을 파도 금을 캐지 못하면 그만인, 생계수단이 되지 못하는 고된 노동이었던 것이었다.

 

한번은 추운 겨울인데 아버지가 밤 늦도록 집에 오지 않아, 어머니와 큰형이 마중을 나갔다.

산 고개넘어 비탈길 절벽에 굴러 떨어져,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몇년을 다녀도 금도 캐지 못하고, 세월만 보낸탓에, "이제 광산 그만두고 마산으로 이사를 가든지 아니면 농사라도 제데로 짓자"고 어머니에게서 시달리고 있던 상태에서, 이러지도 저렇게도 결단을 못하고 괴로워 하던차에, 술로서 당신의 초라함과 쓸쓸함을 달래었던가 보다..  

https://youtu.be/Q04efPa3swc

2022년2월12일 북한산 원효봉 오후5시

2022-05-20 02:37:00


나는 신림동 고시촌에서 제일 산꼭대기에 있는 고시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꼭대기 고시원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고시원비가 다소 저렴했고, 학원도 다닐 필요가 없었기에 구지 돈을 더  들여서 교통이 좋은 아랫동네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유혹의 환경이 없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다행이 같은 고시원에 세무사 공부하는 학교 후배를 알게되어 같이 공부이야기도 나누면서 많은 도움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때가 아마 내가36살(2003년도)에 회계사 시험에 합격했어니까, 2002년도 35살 때인 거 같다.

 

나는 매일 아침6시에 일어나 1시간 공부하고 7시에 아침을 먹고 난 후 그 후배와 밖에서 커피한잔 하면서 담소를 나누곤 했는데, 한번은 그 후배가 다른 후배를 소개시켜 주겠다는 것이다..그것도 여자 후배를..

나는 너무나 반가웠고 주말에 내가 술을 한잔 사기로 했다.

 

"근런데, 형님! 그 여자 후배가 형님보고 뭐라 할 줄 아십니까?"

"어잉?" 나는 뜬끔없는 후배의 눈 흘기는 질문에 당황했다...

"세상에 뭐 이런 선배가 다 있노?" 할 겁니다 아마"

"어잉? 이 자식이..내가 뭐 어때서?"

 

방에 들어와 가만 생각해보니, '이 후배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도 그럴것이, 내가 아침먹고 커피한잔 하면서, 온갖 음담패설을 쏟아낸 것이 후배에게는 역겹게 여겨졋었나 보다...

내 기분에 막 쏟아낸 말도 있지만, 저 공부 안될때 스트레스 해소되어라고 해 준 말도 많았었는데...쩝..

 

고시원 생활이란게, 비육기에 접어든 돼지를 움지이지도 못하게 해놓고 살만 찌게 하는 거 처럼, 밥만 먹고 좁은 골방에 갇혀 있어니 감옥과 다름없다. 단지 스스로 갇혀 있을 뿐.

 

어느덧 토요일이 되어 저녘에 후배와 같이 내려갔다. 그 여자후배는 아래동네에서 같은 세무사공부를 하고 있었다.

저만치서 그 여자 후배가 오는데...

 

"아.."  약간 충격이었다.

슬리퍼에 츄리닝 바지를 입고 나타난 것이다.

말 그대로 신림동 패션이다.. 이 동네에서는 흠이랄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남자 선배들을 만나러 오는데...내가 남잔데...

 

암튼, 나는 일절 내색 않았고, 우리는 주점으로 들어갔다.

여자 후배가 막걸리를 따라 주었다.

"선배, 만나서 반가워", "마셔 !", "꿀꺽~ 꿀꺽~", "크~~아~~"

난 어안이 벙벙 해서 그저 입만 벌리고 있어야 했다.

선후배를 떠나 난생 이런 여인은 처음 이었고, 나야말로 '세상에 뭐 이런 후배가 다 있노?' 였다.

 

손금을 봐 준다면서 내손을 잡아 채고 이래저래 살펴 보더니, 생년월일과 태어난 일시를 말해 달라 했다.

" 원숭이 띠고, 새벽에 태어났다". 

이 말을 듣고, 그녀는 무언가 강한 필을 받았는지, 잡은 내손을 언제 손금 봐준다고 했냐 는 듯 뿌려 치더니,

" 아, 그럼 볼 것도 없네"

 

"원숭이가 새벽에 태어나서 평생 먹을 거 찾으러 다니다가 인생 종친다!"

 

"어..~ 잉?" 난 그녀의 괴기한 행동과 언사에 넋 놓고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내가 걸어온 길, 내가 생각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예언한 것이다.

 

그녀는 2학년 마치고 휴학을 해놓고 공부하던 중이었고, 이듬해 세무사 1차와2차를 동시에 패스한 대단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여고시절에 사주학을 공부했다고 했고, 그건 사실인 것으로 미루어 짐작되었다.

나라면 감당하지도 못 할 생의 근원, 외로움과 고독을 이겨내 온 "철의 여인" 이었다. 

 

얼마전 잠깐 통화를 했는데,, 남편은 해외 파견나가고, 세무법인 일하면서, 아들 둘 키우면서  잘 살고 있단다.

그때 신림동 노래방에서 그녀가 휘젓고 다니며 부른 노래를 되시기며, 원숭이는 오늘도 먹을 거 찾으러 나서야 겠다.

 

https://youtu.be/CATkIfow1EU

2021년6월12일14시53분 강릉에서

"암만 평생 먹을거 찾다 볼 장 다본다 해도, 쉬어가면서 해야겠다"

2022-05-22 14:53:35


드디어 약속 날짜에 나는 한일합섬 면회소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녀는 나오지 않고, 다른 여인이 나를 찾았다.

"저기 저는 00언니 후배인데요, 언니 막 일마치고 나와서 지금 목욕하러 갔어요. 30분만 기다려 달래요"

언니보다는 키가 크고, 늘씬한 그 후배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뭐야? 나한테 반했나?, 오늘 내가 너무 잘 차려 입고 나온건가?'

언니는 마른 체형인데, 그녀는 voluminous, buxom했다. 

'어..괜찮은 여자네..'

맨날 산꼴짝, 오지 공사장에만 돌아다니다 이런 여인들은 구경조차 못하다가, 눈이 휘둥그레진 것이다.

 

좀 있다 나온 그녀는 신데렐라 같이 차려입과 나왔다..

양덕동 골목길을 걸어나오는데. 나도모르게 연방 히죽거려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웃었다.

구름 타고 빛나는 하늘, 훨훨 날아가는 기분 이랄까? 

"야!.그만 웃어."

"응..어..허 허.."

"아 참 ..아까 후배가 너 바보 같다더라"

"그래?"   '이년이.. 그래서 아까 나를 이상하게 쳐다 봤구나! '

'난 너만 있어면 돼'   " 허..허.."

그녀가 곁에 있는 한 천하무적, 어떤 말도 거슬리지 않았다. 

 

'이런 착한 천사를 내가 오늘 몹쓸짓을 한다면 정말 나쁜 놈이야'

'아냐, 그럴수록 더욱 독한 맘 먹고 올가미로 단단히 묶어 놓아야 해'

맘속에는 두맘이 계속 싸우고 있었다. 

 

1987년 초 봄, 당시 20살 먹은 나는 고려용접봉 공장(창원 성주동) 기초공사에서 포크레인 조수로 일하고 있었는데, 한번은 기사형님에게 인생상담을 하게 되었다.

"형님,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이거 어떻하면 좋죠?"

불면 날아갈까, 다른이가 채어갈까 노심초사 혼자 끙끙 고민하던 끝에 결국 털어놓게 되었다.

 

"야 임마!, 여자는 무조건 따 먹고 보는 거야!" "이 축구 같은 놈!"

"예~~?" 나는 눈이 동그래져 되물었다..무슨 뜻인지도 모르겠고, 

"너 따 먹는거 몰라?" 

"어어...열매를 따먹는거면 몰라도..., 여자를 어떻게 따 먹어요??"

기사님은 어이 없다는 듯 쳐다보더니, 의심의 눈초리로 바뀌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짐짓 순진한척 하면서 자기를 놀리는 것으로 생각한 듯 했다.

"너 여자 처음 사귀보냐?"

"예", 기사님은 그제서야 의심의 눈초리를 풀고, 다소 측은하다는 듯 나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무슨 큰 결심을 한 듯 사뭇 진지하게 작전계획을 짜 주었다.

"와, 형님. 정말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박기사님 정말 대단한 천재이십니다"

  

정말이지, 나는 혼자 고민만 했지, 기사님이 알려주는 이런 방법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작년 겨울에 그 기사 형님집에 놀러갔는데, 북마산 꼭대기에 단칸방 살림을 차리고, 형수님이 연탄불에 갓지은 쌀밥을 마른김에 싸서 유치원생 자녀 2명과 저녘을 먹었다.

"주기사 여자친구가 생겼다는데..결혼하면 좋겠네.."기사님은 진심인지, 띄워주는 말인지 알 수 없지만 적극적이었다. 형수님은" 아유...아직 ..어린데 결혼은 무슨..."

그 형님은 작전계획외에도 자신의 총각시절 연애 경험담과 지금 형수님과의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스토리를 들려주면서 자칭 자신을 연예박사라고 하였다.

 

1986년 19살 봄에는 합천 율곡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차 부품을 구하러 마산에 내려왔다가 그녀를 만나게 되었고, 그간 마음 설레는 편지만 주고 받았다.  가끔 볼일보러 마산에 왔다가 면회가면 시간이 맞지 않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 적이 서너번 있었다. 3교대로 일하고 학교수업까지 하니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는 달리 어디 가기로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해운대로 가자고 제안했고, 그녀도 흔쾌히 응했다.

"가자, 해운대로~~!"

"가자, 해운대로~~!"

 

[bad case of loving you] https://youtu.be/Vum95tmkruY

 22년8월20일(토)19시 북한산 의상봉

 

그런데 지하철공사로 해운대는커녕 버스안에서 시간을 다 보낼 수는 없어서, 서면에서 내려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영화가 재미있었는지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그녀도 깔깔거리며 내가슴을 토닥이기도 했지만, 난 도시 다음 실행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골몰하느라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원래계획은 해운대에서 놀다 어찌하여 막차를 놓치고, 어쩔 수 없이 그기서 잠을 자는 계획이었는데.. 이제부터는 기존 공식을 응용하여 풀어 나가야 했다.

거리엔 네온사인이 반짝이고, 사랑이 무르익기 좋은 밤의 기운이 도시를 뒤덮고 있을 때, 나는 어떻게든 거사을 성사시키기 위해, 목이마르다고 둘러대면서 술한잔하고 가자고 능청을 부렸다.

그녀도 여리고 순진한 터라 아직까지는 내 음융한 계획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순수히 따라와 주었다.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던 86년 초봄 어느 저녘날. 나는 혼자 식당에서 저녘을 먹고 있었다. 그때 숙소가 양덕동이라서 근처식당을 정해 놓고 밥을 먹었던 터였다.

언젠가부터 나는 내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일하는 것도 재미없고, 무엇보다도 이팔청춘 푸르른 청춘이 여자친구도 없고, 도대체 내가 뭐 때문에 살고, 왜 사는지를 모를 일이었다.

'기술은 배워서 뭐하며, 성공은 해서 뭣에 쓴단 말인가?'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하고 절실한 것은 여자친구이지, 다른 어느것도 아니었다.

그런 여자친구도 없이 기술을 배우느니, 다른 무엇을 하느니 하는 것은 가식이며, 자신을 속이면서 사는 나부랭이 인생이었던 것이다.

신세를 한탄하며 힘없이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데, 새초롬하게 생긴 여학생 2명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때가 아마 일요일 저녘이었던 듯하다.

자세히는 못봤지만 괜찮은 듯 했다.

얼마남지 않은 밥을 물에 말아서 여학생들이 나갈 때 까지 최대한 천천히 먹었다.

그녀들이 나와서 걸어갈 때, 나는 대담하게도 뒤를 밟기 시작했다. 아무런 계획도 생각도 없이 홀리듯 따라갔다.

어렸을 때부터 숫기도 없고 말도 없던 내가 19살 청춘이 되면서, 어디서 사내다운 기운이 불끈 솟아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눈동자는 커지고, 심장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오로지 하늘에 계신 높으신 분만이 내 몸을 조종하고 있었다.

한일합섬 골목입구에 다다라서, “저기요..” 그녀들을 불러 세웠지만, 막상 할 말이 없었다. “저기.......저기......”,한참을 머뭇거렸다. 무어라 말은 해야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기...저기...양덕동은 어디로 가야 되죠?”,

아이쿠, 이런 병신 쪼다 같은 쎄끼가 세상에 또 있을까나?, 여기가 양덕동인데...’

그녀들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도저히 이남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했다.

저기... 그게 아니고...그게 ...아니고...”

온몸이 후줄근 해지고, 땀이 삘질삐질 나면서, 팔 다리 머리 몸통은 따로 놀면서, 연포탕에 빠진 낙지마냥 꼬이고 있었다.

‘아..아..하나님 부처님!  여심에 다가가가는 것이  이다지도 뜨겁고 화끈거리는가요?’

눈앞에 여인을 두고, 그마음에 다가가는게 이렇게나 멀고 험한 길인가요?

에베레스트 산을 넘고 태평양을 건너야 닿을 수 있는 건가요? 진정 나는 몰랐습니다...

말을 걸어놓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아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집은 남자만 4형제인 집이어서 어머니외의 여인과는 접촉이 없었다. 방학때는 동네 머슴아들은 우리집에 다 모였다.

시골 동네에서도 또래 여자친구가 1명 있었지만 일찌감치 마산으로 전학을 갔다.

동갑인 여자친구가 된 그녀가 다행히 내 청을 받아들여 우리는 근처2층의 양덕다방에 자리하게 되었다.

나는 외롭다,. 여자친구를 꼭 사귀고 싶다. 좋은 친구가 되도록 하겠다는 등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편지를 할 수 있는 서로의 주소를 교환했다.

난 너무나 기뻣고, 온 세상을 다 얻은듯 기운이 충만했다.

이렇게 처음 그녀와 사귀게 된 것이다.

술집에 간다는 것이 일반 호프집 같은데가 아니고, ‘맥주, 양주 간판인, 여인들이 술을 따라주는 빠알간 술집이었다.

잘 못 들어 왔나 싶었는데, 분위기는 나쁘지 않는거 같아서 조금만 먹고 가기로 했다.

그녀도 제법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자신은 장녀이고 실업고를 입학하게 된 구구한 집안사정등 이야기를 도란도란 하였다.

그렇게 부산시 사상구 모라동의 어느 술집 빠알간 조명하래 두 청춘의 이야기꽃은 밤이 깊을수록 활짝 피어가고 있었다.

https://youtu.be/syuz7zGidL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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